티스토리 뷰
※ 다크월드 스포가 존재합니다. 아주 강력한 스포. ;)
그러니 아직 보시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가거나 창을 꺼주세요.
줄거리: 그러나 죽음은 그에게 멈추라고 명하지 않았고, 여기 가장 이질적인 것이 되어 서 있었다.
글쓴이 주: 영화 보고나서 떠나지 않는 생각들 OTL
이질적인 것
Stranger
written by windmill
병사 하나가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그는 꼭 방안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아주 조용했다. 방을 가로 지는 그의 발걸음에는,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마냥 소리 없었다. 마치 이 방안의 누군가를 깨우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는 아주 서서히 걸어갔다. 느리게. 모든 것이 그 발걸음에 달린 듯, 시간을 더디게 가게 해주는 듯, 이 일이 영원히 미뤄질 수 있는 듯이. 하지만 그 모든 걸 비웃는 마냥 병사는 초록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다른 이가 자리를 대신했다. 로키 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고 누워있는 오딘이 있었다.
로키는 미동조차 없는 아버지신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황금빛 관 위에 누워 발할라로 나아갈 나룻배를 기다리는 시체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로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시체같이 누워있는 아버지신과 마주했다. 바뀌지 않는 풍경에 숨 막히듯 그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안은 그가 (깊은 저 어둠 속으로, 저 나락 속으로) 떨어지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황금빛이며, 오딘이 누워있는 침대, 이곳에 존재하는 공기까지. 그러나 그것을 들이마시고 있는 그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똑같이 오딘을 내리 누리는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진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영원히 깨어날 것 같지 않은 그를 내려다 본적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숨소리를 (그리고 어머니의, 그의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궁니르를, 왕좌의 증표를 쥐며 혼란스러운 감정과 그 모든 진실을 뒤로한 채 누워있는 아버지신에게 (어머니에게) 맹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라우페이를 본 적이 있었다. 얼음 칼날이 차갑게 반짝이며 오딘에게 겨눠지는 모습을.
그리고 넌 오딘의 아들 손에 죽는 거다.
그것은 아이러니였다. 로키는 지금 라우페이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그 서리 거인이 오딘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속삭였던 그날처럼, 여기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그러했듯 누워있는 아버지신을 보며 저주를 퍼부을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 멍청한 왕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을 부정하며 비꼬며, 그래, 내가 얼어 죽도록 내버려 뒀어야지, 되받아 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말도 그의 목에 자리 잡지 않았으며, 어떤 말도 형태를 만들지 않았다. 입은 꿰어진 듯 벌어지지 않았다.
로키는 분명 그날은 자신의 발아래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오딘(과 토르)을 볼 거라 여겼다. 그날은 과오를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로키 그의 가치를 인정해주며), 피와 진흙이 범벅이 된 채 용서를 구하는 얼굴을 보는 날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했었다. 혹은 로키 자신이 내뱉은 거짓을 삼킨 오딘의 쓰러지는 등 뒤로 칼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딘의 경악과 두려움, 천천히 물들어가는 죽음의 색을 내려다보며 로키는 비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변하지 않는 풍경 속에 그는 서 있었다. 이 아이러니 속에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서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달려와 주지 않을 이 방안에서 그는 한때 아버지였던 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을 거다, 아버지신. 그대의 과오로 모든 게 그대를 뒤로했어. 하나는 차가운 땅에 피를 흘리며 식어 갔고, 하나는 그대의 오만함으로 목숨을 걸며 싸우고 있어. 그리고 그대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하나는-
로키의 손에는 어느새 그날의 얼음 칼날처럼 차갑게 빛나는 단검이 들렸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차가움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그 모든 감각을 둔하게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상황에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었다. 오딘의 아들이 라우페이를 죽이고, 라우페이의 아들이 오딘을 죽인다. 이 훌륭하고도 완벽한 대구를 이루면서, 가장 역설적인 이 상황에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어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무뎌져 가는 감각을 되돌리지 못했다.
그는 단검을 쥔 손을 가늠하듯 들어 올렸다. 이 정도의 날카로움이면 얼마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깊이 찌르면 깨어나지 않은 채 잠들어 버릴지,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 하나로 끝낼 수 있는지. 어쩌면 그가 검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을 오딘의 피로 지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감각이 돌아와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피를 나눈 아버지가 그러했듯, 단검을 휘둘렀다.
---
로키는 아버지와 단둘만이 남은 적이 잘 없었다. 오딘과 같이 할 때면, 그에겐 꼭 동반자가 같이했다. 왕을 지키는 병사들, 왕에게 명령받는 신하들, 왕의 옆자리에 언제나 서 있는 여왕, 그리고 왕의 첫째 왕자.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 단둘이 남게 되는 상황이 아주 어색했다. 그날은 로키가 막 어머니에게서 배운 마법의 응용법을 찾아 왕궁의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는 새로운 지식의 경이감에 푹 빠져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았고, 토르는 서고에까지 들어와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으므로 모든 집중을 책에다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 다가온 오딘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깨 위로 갑자스레 올라온 강하고도 따뜻한 손의 무게에 그는 깜짝 놀라 읽던 책을 떨어트렸다.
"이런, 내가 널 놀라게 했구나."
오딘은 언제나 그의 형 토르에게 그러하듯 어깨를 강한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는, 허리를 숙여 책을 집어 들었다.
"아- 아버지?"
"바니르의 주문서? 마법에 관해 찾고 있었니." 오딘은 책을 한번 살펴보더니 로키에게 건넸다.
로키는 아직도 얼떨떨한 마음에 책을 건네받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책 표지만을 살폈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의 모서리를 더듬으며 아버지가 그를 갑자기 찾아온 의중이 무엇인지 가늠하려 애썼다.
"프리가가 네가 마법에 월등한 재능을 보인다고 얘기하더구나. 그 애가 검이나 창을 들고 휘두르는 것보다 더 훌륭히 해낼지도 모른다고 말이지."
로키는 자신의 머리 위로 강하게 울리는 아버지의 말에 몸을 강하게 움츠렸다. 언제나 그의 아버지는 토르가 훈련에서 상대방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을 칭찬했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형처럼 강해지거라 하며 식사 끝에 말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버지의 바람대로 해내지 못한 자식을 마침내 질타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음 말에 다시 한번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프리가, 네 어머니가 그렇게 칭찬하던 재능을 나도 한번 보고 싶구나."
"정말요, 아버지?"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니?"
로키는 눈을 깜빡거렸다. 다시 한번 깜빡거렸다. 오딘은 자신의 앞에서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어서, 한번 보고 싶다." 그는 로키에게 얼른 해보라며 손짓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작지만 아주 밝은 초록빛이 오딘과 로키 앞에 둥둥 떠다녔다.
"아직, 아직, 이런 기초밖에 못 해요."
로키는 얼굴을 붉히며, 혹시나 아버지가 실망하시는 빛을 띠지 않을까 그전에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어깨 위로 다시 한번 강한 손이 자리 잡더니 그의 어깨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아주 훌륭해." 오딘이 자랑스러움을 담아 말했다. "언젠가 멋진 주술사가 왕이 될 수도 있겠어."
오딘은 언제나 토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랑스러움을 담아 바라보는 시선과 똑같이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키는 자신의 어깨 위 아버지의 손에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기쁨을 느끼며 대답했다.
"훌륭한 왕이 될게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아버지."
---
로키는 오딘의 옷을 적시고 있는 피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쥐고 있다는 감각조차 잊어버린 손을 바라봤다. 손에 쥐고 있는 단검에서도 붉은 피가 방울지며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오딘을 찌른다면, 그의 피로 이 차가움을 없애고 이 무뎌짐도 없애버릴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독한 무감각은 더 퍼져갔다. 마치 식어가고 있는 오딘처럼, 언제나 잠들어 있을 오딘처럼, 흐르고 있는 피가 굳어져 흉측하게 변색하고 말라 비틀어져 버린 것처럼.
로키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아버지신을 바라보았다. 피가 그의 몸 전체를 타고, 침대를 타고 바닥을 적셔 가는 것 말곤 이 방안의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식어가는 시체를 향해 휘저었다. 오딘과 그의 앞에 초록빛이 생기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로키 그 자신이 누워 있었다. 식어가며.
내일 그는 병사를 불러 이 시체를 나룻배에 실어 보내라 할 것이다. 그는 아스가르드에서 여전히 범죄자였기에, 그의 시체를 몰래 태우려는 것도 궁금증을 사지 않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아버지신에게 홀로 작별을 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영원히 알 수 없었음에도.)
그는 식어가고 있는 그 자신을 바라봤다. 이 풍경처럼 변하질 않을 로키를 쳐다봤다. 결국, 그는 저렇게 누워 있어야 했다. 변하지 않은 채 저 자리에 누워, 모든 것이 흘러가길 내버려뒀어야 했다. 그러나 죽음은 그에게 멈추라고 명하지 않았고, 여기 가장 이질적인 것이 되어 서 있었다.
로키는 차갑게 굳어버린 오딘처럼, 자신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어떤 만족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가죽 옷 아래 깊숙한 곳에서,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아려왔다.)